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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 불황 극복 원년…다시뛰는 한인들-5] "희망을 잃지 않으면 뭐든 할 수 있지요"

이상철(49·가명)씨에게 2011년은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업실패에다 교통사고까지 당하는 암울한 시기를 거쳐 이제는 ‘희망’이라는 단어를 떠올려도 될 것 같기 때문이다. 이씨는 “어려운 시기를 겪다 보니 나에게 기회는 다시 올 것 같지 않았는데, 이렇게 기회가 주어져 너무 행복하다. 이제는 앞만 보고 달릴 것”이라고 각오를 다졌다. 뉴욕과 뉴저지에서 7개의 아이스크림 프랜차이즈 가게를 운영했던 이씨는 금융위기의 파고를 넘지 못했다. 한때 연 매출 500만 달러까지도 올렸던 사업이 금융위기가 닥치자 자금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4년 만인 2008년 10월에 문을 닫아야 했다. 은행 대출과 자기 자본을 합쳐 200만 달러를 투자했으나 한 푼도 건지지 못했다. 이씨는 “가게마다 렌트가 2~3개월씩 밀렸고, 그때는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다. 사업체를 처분하고 나니 알거지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살고 있던 집도 압류위기에 처해 헐값에 넘기고 식구들 모두 렌트로 옮겼다. 그래도 여전히 20만 달러의 빚은 고스란히 남았다. 이후 절치부심해 2009년 8월부터 네일서플라이 회사에 영업사원으로 들어갔다. 순전히 커미션제로 근무했고 오전 5시부터 밤 10시까지 주 6일을 열심히 일한 덕분에 월 5000~6000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지난해 4월 어느 날 거래처로 가기 위해 운전 중 너무 피곤한 나머지 깜빡 졸았고, 대형 교통사고로 이어졌다. 상대방 차에 탔던 3명은 한 달 이상 병원 신세를 졌을 정도였다. 불행 중 다행인지 이씨는 가벼운 부상만 입었다. 결국 이 일로 회사에서 해고를 당했고, 다시 실직자가 됐다. 이씨는 보험분야의 최고 전문자격증인 공인생명보험사(CLU)에 도전했고 지난해 11월에 합격했다. 자신을 얻은 그는 미국 굴지의 보험회사 영업직에 지원했고, 10번의 인터뷰를 거쳐 12월 정식 직원으로 채용됐다. 마지막 인터뷰 때 미국인 면접관의 “나이도 많고 영어도 그저 그렇고, 크레딧도 안 좋은데 잘 할 수 있겠냐”는 물음에 “희망이 있는 사람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이씨는 “한때는 전화와 전기도 끊기고 주머니에 1달러가 없어 점심을 굶은 적도 많았지만 언제나 희망을 잃지는 않았다. 항상 긍정적인 사고를 갖고 있으면 기회는 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직 빚이 7~8만 달러나 남아 있지만 이제는 조금씩 갚을 수 있게 됐다는 이씨. 그의 목표는 회사내 5000명 영업사원 중 ‘톱 100’에 들어가는 것이다. 권택준 기자 tckwon@koreadaily.com

2011-01-06

[신년기획 불황 극복 원년…다시뛰는 한인들-4] "부엌전문업체로 미국 시장 개척할 터"

한국과 미국에서 20여 년 간 건축업자로 잔뼈가 굵은 제임스 장(54·사진)씨는 새해가 시작되면서 새로운 희망을 품고 있다. 불경기 직격탄을 맞고 지난해 13년간 뉴욕에서 운영했던 건축업체 간판을 내렸던 장씨는 미 전역을 돌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LA를 비롯해 텍사스·샌디에이고·버지니아 등 안 가본 곳이 없습니다. 다른 지역에 사는 지인들을 찾아가 자문을 구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새로운 아이템을 찾아 다녔습니다. 이제 뉴욕에서 부엌이나 화장실용 캐비넷과 액세서리 등을 취급하는 전문점을 열기 위해 마무리 준비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건축·인테리어 업체를 운영했던 장씨는 1991년 텍사스주로 이민와 95년 뉴욕에서 자리를 잡았다. 이듬해부터 ‘월드건축’ 회사를 차리고 100만 달러가 넘는 공사를 잇따라 수주하면서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입소문으로 알려지면서 일감이 늘어나고 공사 규모도 커지면서 직원이 10명이 넘을 정도로 중견업체로 자리매김했다. 2007년까지 1년 365일 공사가 끊이지 않았던 이 회사는 2008년부터 시작된 부동산경기침체와 맞물려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일감이 줄어들면서 직원 수도 하나 둘씩 줄이기 시작했죠. 줄일 만큼 줄였는데도 사무실 임대료와 보험료 등을 포함해 한 달에 1만 달러가 넘는 운영비를 감당할 수 없었죠. 당시 생활비는 아예 꿈도 꾸지 못했어요. 나중에는 가격경쟁이 심해지면서 어렵게 공사를 따내도 자재비를 제하면 인건비도 안 나오는 지경에 이르게 됐죠.” 이렇게 심한 혹한기를 보낸 장씨는 2009년 피땀으로 일궈온 회사 간판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다른 건축업체의 하청을 받아 힘겹게 생계를 유지해온 장씨는 그러나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결국 한인을 벗어나 미국인 고객층을 확보할 수 있는 부엌자재 전문업소를 준비하게 됐다. 언젠가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긍정의 힘을 앞세워 끊임없이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찾아온 결과다. 장씨는 “한국에서도 부도가 나는 바람에 미국까지 오게 됐는데 결국 또 한 번의 시련을 겪게 됐다”며 “하지만 누구에게도 거리낄 것 없는 소비자와의 신뢰감이 가장 큰 자산”이라며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이중구 기자 jaylee2@koreadaily.com

2011-01-05

[OC] [신년기획 불황 극복 원년…다시뛰는 한인들-1] 우리는 파트너…상호 존중·무한 신뢰 바탕으로 '동고동락' 스물한 해

말다툼 한번 안해 본 '찰떡 인연' 주종관계보단 함께 일하는 동료 직원도 섬기고 후하게 대접해야 가든그로브의 설렁탕 전문점 '장모집' 전영자 사장과 임윤자 매니저는 올해에도 새해를 함께 맞이했다. 벌써 스무 번째다. 임 매니저가 장모집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90년의 일이다. 한 식당, 한 주인과 21년째 함께 하는 종업원은 여간해선 보기 힘들다. 상대적으로 이민역사가 짧은 오렌지카운티 한인사회에서 한 식당이 20년 넘게 상호나 주인이 바뀌지 않고 유지되는 것 자체가 힘들다. 게다가 서 있는 시간이 길고 무거운 음식 쟁반을 날라야 하는 식당 웨이트리스는 이직률이 높기로 유명한 직업이다. 전 사장과 임 매니저가 오랜 세월을 함께 할 수 있었던 비결은 주인과 종업원의 관계를 넘어선 '파트너십'에 있었다. 오랜 세월 상호존중과 신뢰를 기반으로 쌓아 올린 전 사장과 임 매니저의 파트너십은 경기침체 속 생존을 위한 치열한 경쟁에 나서는 한인 비즈니스 업주, 직원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임윤자(55)씨는 34세이던 1990년 가족이민으로 미국에 왔다. 먼저 미국에 와 식당 웨이트리스로 일하던 시어머니는 "미국에선 여자도 일을 해야 하고 이민 온 여자가 취직하기엔 식당이 최고"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었고 임씨는 그 말에 세뇌(?)된 채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가든그로브에 짐을 푼 지 불과 닷새만에 신문 구인광고를 보고 장모집을 찾은 임씨는 그 자리에서 취직이 됐다. 그리고 강산이 두 번 변했다. "주인 아줌마가 워낙 사람이 좋아요. 섭섭한 적도 없었고요. 워낙 마음이 편해 옮길 생각을 해본 적도 없어요." 임씨와 전 사장의 예사롭지 않은 관계는 서로에 대한 호칭에서도 드러난다. 임씨는 사장을 "주인 아줌마"라고 부르는 유일한 직원이다. "이상하게 사장님 소리가 안 나오더라고요. 주인 아줌마도 싫어하지 않는 눈치기에 계속 부르다 버릇이 됐지요." 임씨보다 14살이 많은 전 사장은 그를 "혜경"이라고 부른다. 혜경은 임씨의 딸이다. 처음엔 "혜경이 엄마"라고 부르다 시간이 흐르면서 "혜경"으로 짧아졌다. 경력이 짧은 직원이나 오래 전부터의 단골이 아닌 고객이 임씨의 이름을 혜경으로 알고 있는 이유다. 전 사장은 임씨를 전적으로 신뢰한다. "나 대신 모든 것을 알아서 합니다. 단골들 입맛도 다 외우지요. 주문하기 전에 알아서 '살코기 국수로 드릴까요'라고 묻는다니까요. 장모집은 저 사람 가게나 다름 없어요." 어느 식당 사장이라도 탐낼 만한 임씨에겐 스카웃 제의도 심심찮게 있었다. 하지만 임씨는 모두 거절했다. 옮겨봐야 더 나은 곳은 없을 거란 믿음 때문이었다. "다른 사장 밑에서 일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말다툼을 안해봤다면 믿겠어요? 하지만 사실입니다. 여기서 은퇴해야죠." 전 사장과 임씨의 관계를 웅변해주는 에피소드 한 토막. 장모집은 최근 가든그로브내에서 이전했다. 임씨는 이 과정에서 한 투자자에게 옛 장모집 자리에 설렁탕집을 차려 줄테니 운영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독립해 내 가게를 갖는다'는 생각에 잠시 흔들렸지만 이내 마음을 정리한 임씨는 전 사장에게 "이런 제의가 있었다"고 말했다. 전 사장은 "장모집 손님은 다 네 손님이다. 네가 문을 열면 내가 문을 닫겠다"고 답했고 임씨는 그 말에 한 자락 미련도 던져버렸다. 전 사장은 임씨 뿐 아니라 다른 직원에게도 군림하기 보다는 함께 일하는 동료처럼 대한다. 다른 사장처럼 테이블에 버티고 앉아 밥 차려달라고 하지 않고 배고프면 스스로 주방에서 꺼내 먹는다. 자연히 직원들간의 팀워크도 다져진다. 장모집엔 오랜 기간 근속하는 직원이 많다. 주방을 담당하는 직원 2명은 각각 18년 16년째 장모집을 지키고 있다. 심지어 궂은 일을 하는 타인종 직원 중에도 16년 근속자가 있다. 멕시코에서 온 '지미'다. 스무 살에 직원이 된 그는 어느덧 36세가 됐다. 장기 근속 직원이 많은 데는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터. "사장이 사람이 좋다"는 직원들의 칭찬만으로는 어딘 지 미진했다. 전 사장의 말에서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찾을 수 있었다. "식당 주인에게 고객은 왕이고 섬겨야 할 대상입니다. 하지만 직원도 섬기는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말 그대로 섬기지는 못해도 후하게 대하려 하죠. 장모집이 20년 넘게 유지되는 건 다 직원들 덕이니까요." 임상환 기자 limsh@koreadaily.com

2011-01-04

[신년기획 불황 극복 원년…다시뛰는 한인들-3] "이제 주급으로 빚 갚기 시작했어요"

“여전히 답답하고 의욕이 없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다시 일을 할 수 있는 것 만으로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싶습니다.” 뉴저지 팰리세이즈파크 ‘소문난 집’ 식당 주방장 민경수(53)씨. 불과 수개월 전만 해도 식당을 운영하던 그였기에 다시 누군가의 밑에서 일한다는 것 자체가 힘든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언젠가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으로 고객들의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민씨가 미국에 이민 온 건 1994년. 이후 팰팍을 중심으로 한 식당에서 주방장으로 근무했다. 특히 소문난 집에서 10여년 가까이 일을 해왔다. 그러던 중 2009년 4월 포트리의 한 식당을 파트너와 함께 인수, 운영을 시작했다. “사실 월 2만~3만달러 가량 적자를 내던 곳이었어요. 그래도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손맛과 성실함이면 업소를 정상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 했었죠.” 민씨는 인수 뒤 출퇴근할 시간이 아까워 식당에서 잠까지 잤을 정도로 열심히 일을 했다. 특히 갈치조림이나 간장게장 등 그만의 손맛이 들어간 새로운 메뉴를 개발해 고객을 맞았다. 그런 노력 덕분에 그 해 여름에는 매출이 상당히 올라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 해 겨울 원재료값이 인수할 때 당시에 비해 30% 이상 올랐고 근처에 새로운 경쟁 업체가 문을 열면서 단체고객이 줄기 시작했다. 그는 “2009년 겨울은 그야말로 암흑이었다. 단 하루도 못 쉬고 일했지만 역부족이었다”며 “종업원 주급이 1~2주씩 밀리기도 했고 여기저기서 돈을 빌어서 메우는 상황이 됐다”고 한숨 쉬었다. 민씨는 결국 지난해 5월 운영권을 포기해야만 했다. “파산을 하고 싶어도 변호사 비용이 없어 못할 지경이었죠. 내겐 빚 말고는 남은 게 없었습니다. 도와준 사람들에게 너무나 미안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이후 몇 개월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그에게 다시 손길을 뻗은 건 자신이 근무했던 소문난 집이었다. 지난해 9월 그는 친정이나 다름없는 이 식당에서 주방장으로 다시 일을 시작했다. 민 씨는 “주급으로 조금씩 빚을 갚기 시작했다”며 “올해는 좋은 일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웃었다. 강이종행 기자kyjh69@koreadaily.com

2011-01-04

[신년기획 불황 극복 원년…다시뛰는 한인들-2] "김치 타코로 뉴요커 입맛 사로잡겠다"

신묘년을 맞아 김치타코 트럭으로 재기는 물론 한식 대중화까지 꿈꾸는 한인이 있다. 경기침체 속에서 사업 실패와 해고 등 쓰라린 경험을 했지만 자신이 갖고 있는 재능과 일에 대한 열정을 그대로 살려 '오뚜기'처럼 또 다시 새로운 도전으로 재기를 다짐하는 이영선(36)씨. 토끼띠이기도 한 그에게 올해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 이씨는 "요리는 나의 천직이다. 공교롭게도 나의 해이기도 한 만큼 그동안의 경험과 아이디어 재점검을 통해 얻은 사업 구상이 제대로 결실을 맺도록 열심히 달려 보겠다"고 말했다. 2008년 4월 야심차게 이스트빌리지에 한식당 '퍼시몬'을 오픈한 이씨. 그는 5개월 뒤 몰아닥친 금융위기를 피해 갈 수 없었다. 고객의 대부분이 월가 직원이었는데,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면서부터 고객이 절반으로 줄었다. 그러다 11월에는 고객이 한 명도 없는 날이 며칠씩 이어졌고, 주말 매출에 의존하는 주가 늘었다. 2009년에는 '소처럼 묵묵히 불황을 이기자'는 각오로 직원 수와 근무시간까지 줄이며 비용 절감에 나서는가 하면 고객 부담을 줄이기 위해 기존 메뉴와 가격 시스템도 과감히 손질했지만 불황의 파고를 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렌트가 몇개월씩 밀리면서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어 결국 8월 문을 닫았다. 그로부터 3개월 후. 맨해튼 미드타운의 한 아시안 식당에서 부주방장으로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나마도 오래가지 못했다. 지난해 7월 비용절감을 이유로 식당에서도 해고됐다. 하지만 이씨는 이같은 어려운 환경에 굴하지 않았다. 2002년부터 맨해튼 요리학교 ICE에서 한식을 가르쳐 온 그는 전공을 살려 가르치는 일에 주력키로 했다. 한식당 컨설팅 사업도 적극적으로 시작한 데다 지난해 9월부터는 브루클린 킹스보로커뮤니티칼리지에서 요리강습도 시작했다. 이러던 차에 그의 요리 경력과 능력을 크게 산 한 친구로부터 사업 제의 연락이 왔고, 바로 요리사들로 구성된 김치타코 트럭이 탄생하게 됐다. 김치타코 트럭은 이르면 다음주부터 롱아일랜드시티와 윌리암스버그 지역을 시작으로 영업을 개시한다. 이씨는 "한식 대중화를 컨셉으로 한 김치타코 트럭으로 뉴요커 입맛을 사로잡겠다"며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최희숙 기자 hs_ny@koreadaily.com

2011-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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